안녕하세요!
오늘은 저희 아들이 너무 좋아하는 한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저희 아들은 한과 중에서도 약과를 참 좋아합니다. 달달하고 꾸덕한 맛이 자꾸 찾게 되는 과자입니다. 일반 과자보다 건강한 과자라 저도 먹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과자인 듯합니다. 다음 주면 추석이 다가옵니다. 어른들을 찾아뵈러 가는 길에 맛있는 한과도 같이 들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과는 무엇인가요?
한과는 한국의 전통 과자로, 주로 떡과 한정된 재료로 만들어지는 달콤한 간식입니다. 대표적인 한과로는 유과, 강정, 식혜가 있으며, 이들은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주로 소비됩니다. 유과는 떡을 기름에 튀긴 후 설탕이나 꿀을 입혀 만든 과자입니다. 강정은 다양한 견과류와 시럽을 혼합하여 만든 것으로, 바삭하고 고소한 맛이 특징입니다. 식혜는 발효된 쌀로 만든 음료로, 달콤하면서도 소화가 잘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한과는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오랜 전통과 깊은 의미를 담고 있어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과의 유래를 알고 싶습니다
한과의 유래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과자를 가리켜 과정류(菓釘類) 또는 우리말로 과줄이라고 한다. 본래는 과일을 과자로 만들어서 먹었으므로 생과(生果)와 비교해서 가공하여 만들었다 하여 과일의 대용품이라는 뜻에서 조과(造菓)라고 하였다. 초기에는 중국 한대에 들어와서 한과(漢菓)라고도 불리다가 외래과자[양과(洋菓)]라는 말과 구별하기 위해 한과(韓菓)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 과(果)란 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조(首露王條)에 처음 나오는데, 수로왕묘 제수에 과(果)가 쓰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제수(祭需)로 쓰는 과(果)는 본래 자연의 과일인데, 과일이 없는 계절에는 곡분으로 과일의 형태를 만들고, 여기에 과수(果樹)의 가지를 꽂아서 제수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성호사설(星湖僿說), 1763년>에 조과가 제수로 쓰이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한과의 역사를 알아봅시다.
(1)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수로왕조에 과(果)가 제수로서 처음 나오고 신문왕 3년(683) 왕비를 맞이할 때 폐백품목으로 쌀, 술, 장, 꿀, 기름, 메주()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쌀, 꿀, 기름 등 과정류에 필요한 재료가 있었으므로 이미 한과류를 만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부터 차 마시는 풍습이 성행하면서 진다례, 다정모임 등의 의식에 따른 다과상이 발달하였고, 과정류가 차와 잘 어울리는 음식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삼국시대에 한과가 만들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2) 고려시대
유밀과는 국가의 불교적 대행사인 연등회연 · 팔관회연뿐만 아니라 공사연회(公私宴會) 제사에 필수 음식이었고, 왕공(王公) · 귀족 · 사원의 행사에 반드시 고임상으로 올려졌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충렬왕 22년(1296) 원나라 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간 왕이 결혼식 연회에 본국에서 가져간 유밀과를 차려 그 곳 사람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유밀과가 국외까지 전파되었음과 고려에서는 납폐음식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원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유밀과를 '고려병(高麗餠)'이라 하였으며 고려병을 '약과(藥菓)'라고 부르며 즐겨 찾게 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명종 22년(1192)에는 유밀과의 사용을 금지하고 유밀과 대신 나무열매를 쓰라고 하였으며, 공민왕 2년(1353)에도 유밀과의 사용금지령을 내렸음을 미루어 볼 때 이 시기에 유밀과가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유밀과뿐만 아니라 다식(茶食)도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식은 국가적 규모의 대연회에 쓰였으나 유밀과처럼 일반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에 이어 과정류가 한국인의 의례식품 · 기호식품으로 숭상되었으며 왕실, 반가와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하여 세찬(歲饌)이나 제품(祭品), 각종 연회상에는 빠질 수 없었던 행사식으로 쓰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밀과나 강정 같은 과자는 민가까지도 널리 유행하였으며 주로 설날음식이나 혼례, 회갑, 제사음식으로 반드시 만들어야 했다. 이처럼 과정류가 성행하자 이 시대에도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조선왕조의 종합 법전으로 일컬어지는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이르기를 "헌수, 혼인, 제향 이외에 조과를 사용하는 사람은 곤장을 맞도록 규정한다"라고" 하였다.
(4) 현대의 과자
1900년대 서구의 식생활 문화가 유입되면서 우리 고유의 전통 한과는 서양과자에 밀려 그 설 자리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밀가루 · 설탕 · 유제품을 재료로 해서 만든 과자류는 더욱 다양해지고 풍성해진 반면 전통 과정류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정 때문에 상대적으로 점차 그 기호도를 잃어가게 되었다. 최근에는 의례가 간소화되긴 하였지만 명절, 제사, 혼인, 경사스러운 날의 선물로써 한과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과 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전통 한과에 대한 관심 또한 확산되고 있음은 실로 다행한 일이다.
한과의 재밌는 역사 한 장면을 알려드리겠습니다
613년 신라 김유신은 고구려 첩자인 백석(白石)란 자의 꾐에 빠져 고구려로 납치될 뻔했었다.. 이때 김유신을 구하기 위해 내림, 혈례, 골화 등 세 곳의 호국신이 여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이들은 김유신에게 맛있는 과자(美菓)를 대접해 주면서 백석이 첩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어 그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결론
한과는 한국 전통 과자의 한 종류로, 그 기원은 고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과의 기원에 대해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에 문헌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한과는 주로 왕실과 귀족들의 음식을 구성하며, 명절과 특별한 날에 제공되었습니다. 특히 왕실에서는 명절이나 중요한 행사에서 한과를 만들어 손님을 맞이하는데, 이는 고귀한 대접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도 한과를 직접 만들어 대접하는 가정은 정말 귀한 손님인 사위가 처음 집에 들어올 때나 여자가 시집갈 때 이바지음식으로 해 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정성이 담긴 음식이기 때문에 아직도 사용되는 음식입니다.
한과는 단순한 간식을 넘어 역사적 소품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로부터 궁중에서는 왕의 생일이나 특별한 연회에서 한과를 선물하거나 상징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유과와 강정은 왕실의 명절이나 축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한과의 아름다움과 섬세한 장식은 왕실의 위엄과 풍요를 표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현재에서도 한과의 여러 가지 옛 자료들을 살펴보며 우리나라의 풍습이나 제도등을 짐작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과는 세시풍속이나 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조상의 영혼을 기리고 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한과를 제사상에 올리거나 명절에 나누는 것은 가족의 단합과 전통을 기리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한국 전통문화의 연속성과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요소로, 한과는 단순한 간식을 넘어서서 역사와 문화의 상징적인 소품으로 여겨졌습니다. 현재는 제사가 많이 축소되거나 없어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한과를 제사상에 올림으로써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추석때에 가족들과 한과를 먹으며 정을 나누는 모습을 가져보고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는 자리가 되길 바래봅니다.